덕흥리 고분의 견우는 백색의 책과 적황색의 소매통이 넓은 포를 왼쪽으로 여미어 착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주로 관리가 착용하고 있으며, 견우의 관모와는 다른 여러 형태의 흑색 책을 쓰고 있다. 포의 길이는 땅에 끌릴 정도로 매우 길어 고구려시대의 귀족들의 옷차림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평민들은 소매 좁은 포를 입은 반면, 귀족들은 소매 폭이 넓은 포를 입었다.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이는 소매의 넓이와 직물의 재료, 선 등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시대에는 천연의 섬유를 수확하고 방추자를 이용해 직조한 직물을 생산하던 선사시대의 원시적 양상에서 탈피하여 인위적인 섬유생산으로 전환되어 생산이 활발하여졌고, 직기구를 이용한 새로운 직조방법이 개발되어 각종 직물을 생산하였다. 이와 같은 직물과 염색기술의 발전으로 착장형태보다는 직물과 색상에서 신분의 차이가 더 두드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덕흥리 고분의 이 벽화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앞에서 소를 끌고 있는 견우와 뒤에서 실을 짜고 있는 직녀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견우는 농사의 신을 상징하고 직녀는 길쌈의 신을 상징한다. 이들은 농경사회의 수호신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중국과 일본 등에도 널리 알려진 설화 속의 인물이다. 고대 농경사회의 ‘남경여직’ 즉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는 뜻인데, 성적 분업을 상징하며, 생업을 권장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처럼 농경생활을 한 우리 민족에게는 농사와 함께 길쌈(의생활)이 매우 중요한 생활의 자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4~6세기에는 소나 말이 끄는 쟁기가 널리 이용되었다. 소갈이법이 도입되면서 노동력이 엄청나게 절감되었다. 그리고 깊이갈기를 하게 되면서 지력을 크게 증진시키고 농업생산력도 증대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02년(지증왕3)에 처음 소갈이를 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당시에 처음으로 소갈이법을 도입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장려한 조치로 이해된다. 실제 6세기 이전에 보습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6세기 이전 유적에서 쇠보습이 발견되기도 하며, 심지어 고구려 지역에서는 2세기경 중국 한대의 쟁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괭이와 쇠스랑은 따비나 쟁기로 갈고 난 후 흙덩어리를 부수는 데 이용되었다. 땅을 잘 고르면 수분을 보존하여 흙을 비옥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괭이는 주로 사질토양인 밭농사에 사용되었고, 쇠스랑은 논이 찰진 흙을 고르는 데 이용되었다. 농경의 발달, 그리고 농기구와 토지 소유의 격차로 빈부의 차는 더욱 심해졌으나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였다. 고대인들이 한 해 농사가 시작되고 끝나는 봄가을로 행한 제천의례에는 바로 그러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농업신인 신농(神農)이 벼이삭을 들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오회분 오호묘)는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고구려인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