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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꾼 - 원형사진  
카톨릭출판사
사진

가마는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반네 부녀자들과 혼인식 때 신부가 탈 수 있게 허용되었지만 단순히 탈것이 아니라 위계질서를 상징함으로서 관원들의 등급에 따라 탈 수 있는 가마의 종류를 제한하였다. 가마의 격은 장식이 아닌 몇 명의 가마꾼으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가마꾼이 많을수록 행렬이 화려해짐은 물론 요동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자가 타고 다녔던 것은 14명이, 왕이 타던 것은 20명의 가마꾼이 메었다. 민간의 가마는 두 명이 들고 가는 간단한 새끼가마에서부터 네 명이 전후좌우로 메고 가는 4인교가 일반적이었는데 사치풍조가 만연해 지면서 6, 8, 12인교까지 있었다. 옹주와 공주가 타는 것은 8인교이며 정1품관 정승급은 ‘양교’라 하는 평교자를 주로 타고 다녔다. 김홍도의 그림 「모당평생도」에서 양교를 탄 좌의정 홍의상의 평교자를 보면 수행원까지 20여명이 따르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가면 2품 이상과 승지를 지낸 이에게만 (도성 밖에서만) 말이 끄는 쌍가마가 허용되었으며 그 편안함이 가마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쌍가마의 앞 뒤 두 말과 말구종과 가마 옆에서 끌채를 들고 가는 가마꾼들도 발을 맞출 수 있게 역졸들이 가마 옆에서 ‘권마성(勸馬聲)’이라는 가늘고 기다란 곡조를 뽑으며 간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족의 부녀자들이 말을 타지 않고 가마를 타는 것을 당연시 여겨지게 되자 수령의 위계질서를 잡고, 백성들의 가마 메는 곤욕을 살펴 정조가 이를 금하도록 한다.
가마는 그 자체로도 제작비가 많이 들어 남의 집 것을 빌려 타거나 전문적인 대여소에 값을 치르고 빌려 타기도 했다. 그러나 가마꾼이 동원되어야 하므로 쉽게 탈 수가 없었다. 특히 정3품관부터는 ‘안롱’을 든 자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호상을 든 자가 덧붙여지기도 했다. 안롱을 든 이가 앞서가면서 길을 비키라는 ‘벽제’ 소리를 지르도록 되어 있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가마 타는 일이 쉬워졌으며 이때쯤 해서 어지간하면 시집가는 날 가마를 태워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일반 백성들도 마을에 공동가마를 만들어 두고 혼례를 치르는 날 돌려가며 사용하였다. 신부가 시집갈 때 가마를 타는 풍습이 보편화된 후에는 ‘가마 탄다’는 말이 혼례의 대명사로 되었다. 서민이 혼례 때 가마를 탄다는 것은 일생에 한 번뿐인 좋은 날에 모든 사람의 기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부잣집에서는 마을 공용가마를 쓰지 않고 고급으로 새로 맞추는 등 크게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가마 탈 날이 정해지면 신부는 며칠 전부터 음식을 조절했다. 몸을 가볍게 해서 가마의 무게를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한 번 가마에 오르면 내리지 않아야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래서 가마 안에는 사기, 놋요강을 넣거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지승으로 만든 요강을 넣기도 했다. 또 신행 가다가 낯모르는 가마와 마주치면 길을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마끼리 서로 맞대고 밀어붙이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가마에 밀리지 않도록 경험이 많고 힘이 센 가마꾼을 구하는 데도 애를 썼다고 한다.
안동지방의 경우 신부의 가마에는 ‘삽바’라 하여 무명으로 앞문 부분을 제외한 다른 곳은 전부 X자로 묶는 풍속이 있었다. 이 무명은 신행가마가 지나는 길가에 성황당이 있으면 무색 헝겊을 하나씩 매어 달고 가거나 후에 신부는 시가에 들어설 때 삽짝(사립문) 앞에 짚불을 피워놓고 교군(가마꾼)으로 하여금 이 짚불을 차면서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 가마에 콩을 뿌려 액을 쫓는 풍속이 있었다. 또한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을 덮었는데, 호피는 값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 대신 호피 무늬를 넣은 담요를 덮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은 호랑이가 수호신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민서복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바지, 저고리로 양반의 수탈 대상이 되어 부의 축적은 물론 최소한도의 미적 충족을 위한 자기네들의 복식문화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남자의 저고리도 여복과 함께 간소화 경향을 보이나 국말에 가서야 어느 정도 다시 길어지고 커지는 경향을 보였다. 바지는 주로 삼국시대의 궁고 형태를 변형한 사폭을 대고 있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발목 부위를 잡아매는 것이 기본이었다. 저고리, 바지에 버선과 초리를 신었다.


조효순『복식』, 대원사, 1989
김원모,정성길『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 가톨릭출판사, 1997
유희경, 김문자『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1998
안명숙, 김용서『한국복식사』, 예학사, 2001
유송옥『한국복식사』, 수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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