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립경주박물관 황성동 석실고분 |
 |
기타 |
통일신라시대 여성들의 가장 일반적 차림새는 단의(短衣), 표상(表裳)이라고 하는 저고리와 치마이며 이 위에 포 형태의 겉옷을 걸치거나 어깨에 표를 두르기도 하였다. 단, 엄격한 신분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왕실비빈, 궁중여관, 귀족, 평민 등이 착용하는 기본복의 의복양식은 대개 같았으나, 복식금제를 통해 신분별 의례용 착용복의 수량, 재봉방법, 수식재료, 복재, 복색 등으로 귀천을 가렸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원피스형의 포(표의, 表衣)를 입은 통일신라시대 여인의 모습을 경주 황성동 석실고분의 유물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황성동 석실고분은 경주 분지 내의 북편에 위치하는 무덤으로서, 봉분의 바닥지름이 14m에 이르며 남쪽 벽에 동편으로 치우쳐서 짧은 길이 있는 ‘ㄱ’자형의 돌방이다. 여기에서는 토제 인물용, 동물용, 수레바퀴모양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양식과 출토된 유물들은 통일신라 7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물상들의 얼굴과 의복 등은 당나라 인물토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높이 16.5cm의 이 여인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가장 겉옷으로 포를 입은 여인은 가르마를 정수리까지 타고 후두 중간에서 묶어 오른쪽으로 비틀어 결발하였다. 길이가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길고, 옷의 주름진 흐름이 풍성해 보이는 포는 가슴아래에서 허리보다 높게 끈으로 고정시켜 입었다. 소매의 통은 그리 넓지 않으나 손끝이 가려질 만큼 그 길이가 길다. 통일신라시대 여성들의 복식에서는 소매가 매우 길어 손을 가린 것이 많은데 이는 당시의 여성들이 손끝을 내보이는 것을 조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이러한 풍속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여성들이 손끝 보이는 것을 경계하여 한삼 등으로 가리기도 하였다. 여인은 한 손으로 살포시 입을 가린 수줍은 모습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병 모양의 물체를 들고 있는데, 통일신라시기 중요하게 여겨졌던 행사와 연결 지어 이를 혹 길쌈잔치가 끝나고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을 때의 배경 속 인물로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위의 길쌈잔치는 신라의 세 번째 임금인 유리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 최고의 전통 축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부를 두 편으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두 편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했다. 그리고 7월 16일부터 매일 큰 부락의 광장에 모여 베 짜는 내기를 하는데 을야(乙夜 : 밤9시~11시)가 되어서야 하루를 마쳤다. 그러다가 8월 보름이 되면 어느 쪽이 더 많은 길쌈 결과물을 내놓았는지를 따져 내기에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길쌈은 단순한 놀이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당시 세금을 견포나 마포 같은 직물로 냈기 때문에 화폐가치가 있었으므로 직물을 잘 짜는 것은 경제와 직결되었다. 그래서 국가에서 모든 국민의 직물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길쌈놀이를 통해 생산기술을 높였던 것이다. 후대의 고려나 조선에서는 직물을 생산하는 관서의 장인이나 관리들이 모두 남자인데 반해 신라에서는 생산은 물론 감독, 관리도 여자가 맡았다.
 |
문화관광부(유희경 외)『우리 옷 이천년』, 문화관광부, 2001
심종문『중국고대복식연구』, 남천서국, 1981
황사룡『중국복식사략』, 1994
유희경, 김문자『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1998
국립경주박물관
|
|
|
|
|